혼잣말 11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현재 접속자 7
Total 15 / Page 11
혼잣말 목록
  이제 1년...Ⅱ (2020-09-27 10:45)  

본문

♥ (2003.03.04.~2019.09.27.)

소리의 첫째로 태어나, 내게 생명의 탄생을 처음 알게해 준 너...
어린 시절 아빠에게 호되게 혼나고 있던 널 막아줬던 그 날 부터
온 세상이 나인 것처럼 평생 오롯이 나만 바라봤던 너...
갓난쟁이 때부터 항상 내 배 위에서 재우다가,
어느 날, 네가 많이 무거워졌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던 다음 날부터
신기하게도 배에서 내려와 내 팔에 기대어 잠들던 너...
10여년을 간질발작의 고통 속에 죽을 고비를 넘겨오며 고생했던 너...

나이 먹어 시력이 좋지 않았을 때에도 후각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
공중에 코를 몇 번 킁킁이는 것만으로도
퇴근해서 다른 방에서 옷을 갈아입던 날 찾아내던 너...

거울 앞에만 세우면 자신이 개란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늘 피하고 외면했던 너...
토라질 때면 뒤돌아 앉아서 시위하던 너...

깔끔한 성격, 작고 여리여리한 몸에
나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없어 늘 조용하고 침착했던 네가
아가들 중 서열 1위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건강하지 못한 너에 대한 수야와 마루의 배려였겠지...
.
.
.

내 사랑, 내 새끼, 내 영혼의 반쪽...
어떤 단어를 갖다붙여야 널 오롯이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 날 오전 11시 30분 경,
엄마의 전화를 받은 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던 내가,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하루를 보내고
텅 빈 집 스탠드 불만 켜놓은 큰방 붙박이장 앞
여름쿠션 위에 곱게 누워 무릎담요를 덮고 있는 널 보고서야
네 죽음이 실감이 났어...
폭우 소리에 기대어 널 어루만지며
울부짖다시피 소리를 지르며 울었던 날처럼,
그 동안은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1년이었단다.

네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었던 날들...
작디 작은 너의 체온에 얼마나 많은 위안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어려서부터 간질로 고생하고, 늙어서는 자궁축농증에 유선종양까지...
소리에 이어 너까지 몹쓸 병에 고생하는 걸 보며
개복수술시키기 애처롭다고
남자애들만 중성화수술을 해주고 너흰 해 주지 않은
무지했던 지난 날을 죽도록 후회했어...

마지막 몇 달 간 호스피스 치료를 받으며 많이 아팠을 걸 알기에

네가 떠나도 절대 후회하지 말자고, 슬퍼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막상 네가 가고나니 이것저것 작은 것까지 후회가 되네...

일찍 마치는 날 유모차를 타고 엄마와 마중나온 널
장난친다고 모른 척 지나가며 놀리기보다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예쁘다 해 줄 걸...

네가 가기 전날, 낑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처음으로 내가 떠먹여주던 사료죽을 거부했을 때
억지로 그렇게 많이 먹이는게 아니었는데...

네가 아파하는 것 같아 병원에서 받아뒀던 패치를 붙여줬었는데
그것 때문에 밤새 상태가 좋지 않다가 그렇게 빨리 가 버린 건 아닐까...

너희들이 다시 태어나 우연히 나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고 해도
너희를 알아보고 스쳐지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지 말고 그 곳에서 날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혹시 내 말에 서운하지 않았을까... 하는...
지금에 와선 아무 소용도 없는 그런 후회들...

빈아,
너를 잃고 어떻게 살아갈까 늘 걱정했는데...
그 걱정이 부질없게도 텅 빈 마음을 가지고도
하루하루 너무나 멀쩡하게 살아진다.
눈물도 목메임도 아주 가끔일 뿐
마음 아프고 눈물나도록 널 추억할 수 있는 이 시간들이 오히려 기껍다.
다시 널 안아볼 수만 있다면...
이렇게 소중했던 너인데...
내게 남은 긴 시간 동안 내가 널 잊어버리는 날이 올까봐
무서워...

사랑해, 빈아...
이제 삶에 대한 의욕도, 이유도 사라져버렸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그 날을 기다리며,
언니 힘내볼게...


PS.
난 아직도 생각해 보곤 해...
2019년 10월 11일,
업무 중 뜬금없이 하루종일 들려왔던 선명한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시간 날 때마다 뒤지고 찾아보아도 도무지 소리의 출처를 알 수 없었던 그 날,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신발을 갈아신으려다 발치에서 발견했던
그 작디 작은 아기귀뚜라미가 정말 너였을까...

평소 곤충을 극혐했던 내가 보아도
조금 귀엽다 생각되었던 쪼꼬미 귀뚜라미가
뭐 그리 무섭다고 종이와 비커를 이용해 구름다리 아래 화단으로
그렇게 떨어뜨려 보내어 버렸는지...

조금 더 같이 있을 걸...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뒤늦게서야 난 자꾸만 그게 너였던 것만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작은 귀뚜라미가 어떻게 도서실까지 들어올 수 있었으며,
작은 존재에게는 너무나 위협적이었을 내 발치에서
어째서 꼼짝도 않고 하루종일 그렇게 울어댔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살아생전 내 곁에서 한치도 떨어지지 않았던 네가 떠올라서...
게시물 검색

Copyright © Castle4u.com All rights reserved.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